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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또 10기 지원] 내 삶의 지도

움채채 2024. 9. 22. 23:40

* 이 글은 글또 10기 지원을 목적으로 작성된 글입니다...만! 쓰다보니 그 목적 이상의 제 인생 회고를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초~중학교 : 평균으로 승부 보는(!) 모범생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칭찬/배려/양보 와 같은 말이 붙는 종류의 상장을 휩쓸곤 했다. 상장을 가져올 때마다 엄마는 "이런 거 그만 받아와라, 자기 밥그릇 못 챙기는 게 뭐 자랑이라고!"하며 농담반 진담반 염세 섞인 말을 하곤 했는데, 꽤 말 잘 듣는 딸이었지만 이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게 좋았다! 

 

학창시절의 '좋은 사람'의 조건은, '모범생'이라는 단어로 손쉽게 정의내릴 수 있었다. 모범생이 되려면 충족해야 할 게 꽤 많았다. 칭찬과 배려의 아이콘이 되는 것뿐 아니라 좋은 성적을 받는 것,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것, 너무 말괄량이이지도 너무 얌전하지도 않은 것...

무언가 하나가 특별한 학생보다 무엇 하나 못하는 것 없이 무난히 잘해내는 학생이 선생님께 더 예쁨받고, 한 과목은 늘 100점인데 나머지가 50점인 것보다 늘 모든 과목이 95점인 게 더 좋은 성적으로 인정 받는, 그런 학창시절의 생리에 아주 딱 맞는 모범생으로 지냈다.

내 초~중학교 시절이 그저 따분한 기억인 건 절대 아니지만(28년 인생을 한 바닥에 요약하는 글에는 담을 수 없는 나만의 도파민들도 물론 있었다!) 큰 방향성에서는, 지금의 시선으론 재미없는 이런 인간 군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심축이었던 학생은 맞았던 것 같다. 

 

이렇게 나는 모난 데 없이, 평균을 내었을 때 늘 훌륭한 학생으로, 그만큼 훌륭한 중학교 성적을 들고 특목고에 입학한다.

 

고등학교 : 나의 '애매함'에 대한 인지

특목고에 입학 후 첫 중간고사에서, 나의 우수성이 곤두박칠치는 경험을 한다.

첫번째 문제에서 끙끙대고 있는 나를 두고 무심하게 시험지를 다음 장으로 거침없이 넘기던 소리들, 그날 저녁 채점한 뒤 인생 처음 받아보는 점수를 시험지 구석에 애써 콩알 만하게 적던 순간, 나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고 엉엉 울던 룸메를 달래주며 울음을 참던 기분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지금은 너무 귀여운 기억들이다....😌)

모두가 모범생인 이 학교에서, 내 모범성은 너무나 애매한 것이었다. 이 때부터 나의 '애매함'이라는 지독한 속성과 크고 작은 싸움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아무튼 성적은 나를 배신(...성적은 죄가 없다)했지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기숙사에서 매일 24시간을 함께 지내며 친구들과 처음으로 자아를 듬뿍 담은 상호작용을 하며 깊고 단단한 관계를 맺으며 첫 학기를 보냈고, 1학년 2학기와 2학년 1학기에 반장이 되었다. 

그리고 머뭇대던 나를 친구들이 부추긴 덕에 2학년 2학기에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다른 반에 친한 친구들이 많거나 아는 선후배가 많은 인싸 유형은 저언혀 아니었던 내겐 더욱 의미 있었다. 내 주변의 작지만 강력한 신뢰 관계들이 잔잔히 퍼트린 이야기들이 투표로 이어졌을 것이다. 인간적인 신뢰를 받는 능력이, 좋은 사람으로서의 내 평균을 높여주는 또다른 믿을 구석이 된 것이다!

 

자존감을 성적이 떨어트리면 주변이 그것을 채워주고, 또 그걸 성적이 떨어트리면 반장/회장 활동이 높여주고.. 내 고등학교 생활은 '성적'과 '인간관계력'이라는 두 강력한 음과 양이 계속해서 내 평균을 줄다리기했던 시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어쨌든 너무 떨어지지는 않은 자존감의 상태로, 대학에 간다!

 

~ 대학교 2학년 : 애매함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인정

'대2병'이라는 말이 있다. 대학입시의 고생에 대한 보상심리로 신나게 놀고 나서 2학년이 되면, 이전에는 해본 적 없던 인생 설계를 해야 하는 막막함의 늪에 빠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그 병을 아주 지독히도 앓았다. 귀신 같이 21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공부만이 정답길이었던 10대 때의 문법을 비웃는 사회의 시작이었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하고 싶고 하기 싫은지 - '나는 무엇을'로 시작하는 어떤 질문에도 명확히 답변할 수 없었다. 생기부와 자소서에 써낸 꿈은 있었지만, 그것이 입시가 가스라이팅한 가짜 꿈이라는 걸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나둘씩 미래를 그리며 대외활동을 하고, 복수전공을 하고, 크고 작은 선택과 실천을 해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괴로웠다. 

 

스물한 살의 나는 스스로의 애매함을 혐오하며 병들었고, 인생 그래프의 최저점을 찍는다.

신기한 건 그렇게 몸무게가 10키로 가까이 빠지고 몸과 마음이 병들면서도, 내 인생에서 너무나 필요한 시기임을 너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러 더 온몸으로 괴로움을 감각하면서 그 시기를 났다.

내가 꽤 철저히 지켜온 사회의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결국 나를 병들게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한국 교육에 대한 회의, 앞서 나가는 주변에 대한 열등감, 어떻게 해야 이 질문들에 해답을 할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는 막막함... 등등의 들끓는 감정들을 시간과 함께 흘러보내고 나니, 역설적으로 나의 애매함을 인정을 하게 되었다.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애매함을 혐오하는 이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애매함은 내가 평생 가져가야 하는 반려자임을 인정하고, 그저 '김 애매 채은'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2병 이후 ~ 취업 준비 : 애매함을 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러고 나니 편해졌고, 또 한 가지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내 전공인 신문방송의 전형적인 직업을 나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신방과에는 입학 전부터 꿈꾸던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나가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 동기들을 보면서, 아 기자는 저런 애가, PD는 이런 애가, 광고는 그리고 연극영화는 요런 애가 하는 거고, 나는 저것들 못하겠다 - 하는 덤덤한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스물 한살에 벌써 각 분야를 훌륭히 대변해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나는 융합소프트웨어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복수전공을 해야겠다! 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 대2병을 호되게 앓던 시기 아무것도 안했다간 열등감에 괴로워 죽을 것 같아서, 새내기 때 교필이었던 기초파이썬 과목을 친구들에 비해 덜 괴롭고 재미있게 들었던 딱 그 기억 기대어 한 과목만 더 들어보기 시작한 게 도화선이 되었다.



운이 좋게도 그 공부가 어렵지만 재밌다고 느꼈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C언어가, 네트워크가, 운영체제가 대체 어떻게 IT 서비스가 된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재밌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숨통 트이게 했다. 

그리고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정말 진짜 모르겠지만, 나는 모름지기 '김 애매 채은'이니까, 개발을 하거나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 사이 무언가를 이어주는 연결다리 같은 걸 하면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직 현실감각 없는 채로 졸업한 뒤 포스코 AI·빅데이터 아카데미와 SSAFY에서 연달아 데이터와 웹개발을 배웠다.

일년 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와 개발자를 꿈꾸는 친구들과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새에 바로 그 "연결다리 같은 것"을 자연스레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캐치해준 팀원들 덕에, 이런 일이 기획과 PM의 일이고 그게 내 적성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고민 없이 취준의 방향성도 바로 기획으로 틀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애매함이 사실은 내 강점이고 능력이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머리로 인지하고 받아들인 때였다! 

 

입사 후 3년 : 후회와 미련 없는 성장 도파민의 시간 

총 3년 반동안 이어진 나의 첫 회사생활은, 아주 크게는 입사 후 3년과 마지막 반년으로 나뉜다.

 

3년 동안 나는 후회 없는 최선을 쏟아 일했고 성장했다.

 

똑똑하고 열정적인 멤버들에게 수없이 자극과 배움을 얻고, 온 에너지와 시간을 일에 쏟으면서 성장에 몰입하는 시간을 보냈다. 일이 재밌고 회사가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들이 미쳤다고 하는 건 일상이었고, 친한 회사 동료들에게 '사측'이라고 놀림 받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나의 애매함이 능력이 된다고 처음으로 느낀,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궁금함을 느낀 이 일에 내 능력이 실제로 발휘될 때의 짜릿함, 하지만 역시나 매순간 너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차오르는 성장의 욕구, 이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도 괴롭지 않은 것을 확인하며 내 적성을 확인할 때의 충만함 같은 것들. 

지금 있는 곳에서 나의 최선을 쏟기만 해도 성장이라는 열매가 내 안에 계속해서 채워지는, 성장 도파민에 절여진 3년이었다. 

 

* 누구나 그렇듯 그 3년의 밀도를 한두 문단의 글로 설명하려니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지만, 이 자세한 이야기는 글또 10기 활동에서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퇴사 전 마지막 6개월 ~ 현재 : 

3년이 MZ 국룰이라고 했던가... 한 번도 이 회사 이후의 '다음'을 생각해본 적 없던 내가, 3년을 바라볼 때부터 다음을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

 

조금씩 연차가 차면서 바라보게 되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또 4년차쯤 되니 살만 했는지(?) 입사 전의 내가 갖고 있었던,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희석된 가치가 리마인드되어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정리된 현재의 내 갈망과 방향성이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 다음이 무엇이 될지를 구체화하는 시간을 보내며 회사생활을 계속했는데, 그 시기가 끔찍하게 힘들었다. 회사가 나를 괴롭게 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쏟지 않는, 또 그럴 수 없는 상태로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한 편으로는, 나는 이제 다른 목표를 가지고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일에만 내 열정을 쏟아부었던 관성이 남아 있어, 준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 또한 괴로웠다. 

덕분에(..) 세부적인 태스크는 상관 없지만, 커다란 목표의 관점에서는 한 가지로 몰입할 수 있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시기를 앞당겨서, 두 달 전 퇴사를 했다!

잠시 멈춤을 가지고 다음을 준비하면서, 나의 99%를 일에 쏟느라 1% 안에 우겨 넣었던 수많은 것(건강, 가족, 친구, 애인, 여행, 쉼, 일 외의 삶에 대한 회고 등)들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또 내가 열정을 쏟았던 일에 대해서도 계속 회고하면서, 소중한 Lesson Learned들을 잃지 않기 위해 정리해가고 있다.

글또에 지원하는 것도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바빴던 탓에, 내가 일했던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과 생각을 충분히 기록하지 못했던 것이 많이 아쉬운 요즘이다. 특히 커리어에 관해 기록하는 것은 왠지 무게가 크게 느껴져서 시작조차 포기한 순간들이 많았다. 글또를 마치고 난 6개월 뒤에는, 일과 공부에 대한 글도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근육이 생겨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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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내 삶은 '좋은 사람'의 기준을 계속해서 재정립하면서, 그에 맞춰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의 연속이어 왔던 것 같다(써놓고 보니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인 것 같기도..).

 

초중학교 때의 모범생으로서의 삶도, 고등학교 때의 반장과 학생회장 활동에서 가치를 느꼈던 것도, 끔찍했던 대2병을 애써 도망치지 않았던 것도, 직장생활에서 '사측' 프레임(농담입니다)을 무릅쓰고 에너지를 쏟았던 것도, 모두 그 때의 내가 추구하는 좋은 사람, 멋진 사람으로서의 실천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론 이해하기 힘든 선택들도 있지만, 후회되는 건 거의 없다.(물론 그냥 까먹은 것일 수도 있다..) 그 때의 나는 그 때의 내가 정립한 좋고 멋진 것의 정의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앞으로의 내 기준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분명 바뀔 것을 안다. 100세 시대에 아직 30년도 안 살았는데 이렇게나 달라져왔으니...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두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