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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채채의 블로그
뒤늦은 2024 회고 : 💥한 해 고생많았고 사랑해!💥 본문
왜 뒤늦은 회고냐면요...
유달리 잘 정리해 보관하고픈 해가 있고, 2024년이 내게는 간만의 그런 해였다.
그래서 회고글만큼은 찬찬히 쓰고 싶어서 정신 없던 연말연초를 보내고 여유를 찾은 지금에서야 쓴다. 모름지기 한국인에게는 신정, 구정, 삼일절(?)- 신년의 기회가 세번 주어지니까 하나도 안 늦었다고 생각한다 하핫!
사실 글만 안 썼다 뿐이지 작년은 한 해동안 많은 회고를 했다. 지난 몇 년과는 다른 생각과 마음과 일들이 삶에 들어서서 밀도 있는 감상과 깨달음이 너무 많았고, 그것들이 순간으로 스칠까 아까워서 의식적으로 곱씹고 생각하고 공유하고 썼다. 특히 하반기는 n번이라는 단위로 묶기 어려울만큼 일상적인 회고의 연속이었고, 연말연초에는 정신 없는 와중에도 회고를 목적으로 한 모임을 여럿 가졌다.
돌아보면, 이렇게 정성껏 남기고픈 해는 역시나 이전과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거나 그걸 직접 선택했을 때였다.
텅빈 스스로를 호되게 마주하며 나에 대한 정의를 빈칸에서 새로 시작하는 괴로움으로 성장한 2017년, 반년의 교환학생으로 실체 있는 세상의 너비를 경험하고 그 가치를 내재화하며 한층 넓어졌다고 느낀 2019년.
그리고 내 삶의 평균을 벗어나는 선택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는 해내며 행복하게 감당해낸 2024년!
이런 해를 대충 어물쩡 감싸 보낼 수 없지. 충분하지 않더라도 정성스레 톺아보고자 지금에야 글을 쓴다.
2024 돌아보기
#1 회사를 향한 미움
23년 12월 즈음, 회사에 다닌지 3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를 향한 미운 마음이 생겼다.
앞선 3년간 일은 늘 어렵고 힘들었지만 한 번도 회사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괴로움은 없었고, 그 화살은 대개 스스로를 향했다. 내가 느꼈던 괴로움이라면 더 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하는 일과 사람들과 제품을 늘 애정했고 괴로움을 발판삼아 스스로의 성장을 체감하며 활력 있게 일했다. 그랬기 때문에 미움이 처음 찾아왔을 때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시의 나는 누군가를/무언가를 잘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쓰이는 에너지와 감정이 더 크다. 그래서 이 때의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회사를 미워하는 그 마음 자체였다. 그 감정의 원인은 회사와 일에게 있을지언정 괴로움의 크기가 버거울 정도였던 것은, 미워하는 데에 힘이 많이 드는 나의 성정과, 내가 애정해온 대상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전과 달리 일에 최선을 쏟지 않는 스스로를 견디기 힘든 것과, 그리고 여러 이유로 지쳐 있는 나의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당장 퇴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달리 뜨거워져 있는 감정에 의해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면 후회할 것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선택을 하든 스스로를 담백하게 설득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었고, 그래서 높은 온도의 감정을 달래고 식기를 기다렸다.
#2 처음으로 이 다음을 상상하기
대신 그 시간동안, 다음 스텝을 상상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앞선 3년간 '이 회사 다음'을 제대로 상상한 적이 없었다. 현재 있는 곳에서의 경험이 충분히 활력 있고 유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내 다음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에 충실하고 성실하면 다음이 무엇이 되었든 유효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느끼는 믿음과 활력이 이전 같지 않게 되었으니, 구체적인 다음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 다음을 상상하지 않고는 현재의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의외로 이직은 가장 먼저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회사생활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니고 있는 회사만큼 내가 활력 있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내게는 괴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앞선 수년이라는 시간동안 일과 회사와 사람 모두를 애정하면서 행복하고 활력 있게 일했다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은 경험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 회사를 떠나면서 선택한 다음이 다른 회사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해외 생활'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보통 다음 스텝을 계획할 때에는 직전 경험에서의 레쓴런을 토대로 상상을 시작할 텐데, 그런 관점에서는 전혀 연결성이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도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의아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때의 고민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종의 목소리가 나에게 '채은아 해외생활해야지..!'하고 속삭였다고 말하곤 한다😇
해외생활에 대한 열망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늘 마음 어딘가에 품어왔지만 구체적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아 싫든 좋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 있겠구나' 생각하기까지 했다. 아마 5년 전 부다페스트로 교환학생을 다녀오면서 들고 온 '언젠가는 유럽에서 삶을 살리라'하는 막연한 꿈이, 한국에서의 현실을 마주하자마자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도전에 대한 열망이 커진 시점에 고개를 든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해외생활이라는 선택지는 그 시점의 내가 상상했을 때 유일하게 설레이고 활력이 도는 선택지였고, 감각적으로 나는 이 선택을 하게 되겠구나 느꼈다. 운좋게도 내 주변에는 이런 삶을 살고 있거나 지내온 사람들이 꽤 많아서, 그들을 붙잡아 만나고 물으면서 다음을 조금씩 더 구체화해갔다.
결론적으로는 해외생활을 하기 위한 여러 방식 중에서 유럽으로의 석사 유학을 선택했는데(왜 이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후 유학 준비 과정을 정리할 글에서 따로 다루려 한다), 역시 나는 그저 도전적이지만은 못한 사람이기에 당장의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3 유럽 여행
4월말, 5년 만의 유럽여행을 갔다! 보름동안 런던, 뮌헨, 베를린, 리버풀, 부다페스트를 다녀왔다.
왠지 유학 답사여행처럼 보이지만 시작은 그게 전혀 아니었다. 비행기표는 반년도 전에, 시즌 초의 우리 팀이 너무 잘해서(..) 시즌 후반기의 빅매치는 내 두 눈으로 봐야겠어서 즉흥적으로 끊어두었다. 그 때의 나는 그저 교환학생 때 들고 온 유럽을 향한 향수의 쿨타임이 찼고, 축구를 보고 싶었고, 일한지 3년 즈음 되었으니 장기휴가를 들이밀어볼 수 있겠다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이제는 내가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공간에 가게 된 것이니, '나 유럽이 아직도 좋은가?'하는 질문을 안고 비행기를 탄 것은 맞다. 스물셋 교환학생의 나는 반년동안의 유럽 생활이 분에 넘치도록 행복했지만, 스물여덟의 나는 또 다를 수 있지 않을까 - 하는 의구심에 답을 들고 오고 싶었다.
결론은, 나 역시 아직 여기가 좋구나- 였다. 보름동안 정말 행복했다. 우리 팀은 두 경기 다 졌지만.. 유럽에서의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을 마음 깊이 집어넣었던 5년 전의 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던 시간이었다. '그래 이거지, 맞아 이거였다' 하는 순간들의 연속을 맛봤다. 타지에서 누구보다 이방인의 위치였던 내가 왜 그곳에 이토록 강하게 belong한다고 느꼈는지, 한국의 수많은 편한 구석들을 누리지 못하면서도 그곳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느꼈는지를 진하게 되새기고 왔다.
물론 내가 느낀 많은 감정이 여행자이기 때문이었을 것도. 하지만 운 좋게 이번에 여행한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한국인 지인의 집에서 지냈고, 그러면서 그곳에서 일상을 지내는 삶이 어떤 건지에 대한 감각도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삶을 사는 것이 궁금해졌고,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나는 여전히 이 곳이 좋구나, 그곳에 곁을 두고 삶을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를지언정 그 시작은 설렘과 애정이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고 왔다.
#4 퇴사할 결심, 그리고 퇴사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회사에서의 스스로가 붕 떠 있다고 느꼈다. 다음 스텝을 명확하게 결심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막연한 두려움이 여행에서 해소되면서, 회사는 더 이상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느꼈다. 연초에 회사를 미워하던 뜨거운 종류의 마음과는 달랐다. 퇴사를 '결심했다'기보다는 '아, 나 이제 퇴사하겠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 것이니 어쩌면 초연하기까지 했다.
원래는 유학을 결정하더라도, 회사를 다니면서 유학을 준비하고 실제로 떠나기 직전에 퇴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나를 사회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가 두렵기도 했고, 유학 비용을 위해 돈도 벌어야 했고 - 하는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주변의 시선과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단순히 학교에 지원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것뿐 아니라, 수년간 일에 에너지를 쏟으면서 이곳저곳 성치 않은 몸과 마음을 돌보아 정상궤도로 돌려두는 것, 해외에 오래 나간다면 그간 신경쓰지 못할 가족과 주변에 애정을 나누는 것 등.. 이제는 진짜 결정한 다음 스텝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건 회사에 있지 않았다.
사실 무엇보다도, 지금의 회사에 남아 있는 이유가 오로지 사회적인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돈 때문이라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이런 이유가 절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회사를 다녔던 이유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을 벌려고,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고 이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두 가지를 뺀 대부분의 것을 이 곳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다녔는데, 그 둘을 위해 남는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자기 기만이라고 느꼈다.
이외에도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쳐 그렇게 7월 31일, 첫 직장을 다닌지 꼭 3년 반이 되던 날 퇴사했다!
#5 카페 알바
퇴사 이후 내 주 수입원은 카페 알바이다. 사실은 엄마가 운영하시는 카페에서 일하는 낙하산이지만.. 맹세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카페에서 일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식당, 대학생 때는 어묵가게, 직장인이 되어서는 편의점과 카페 - 늘 자영업을 해오신 엄마의 매장에서 일하는 건 익숙했다. 하지만 학생/직장인과 같이 나를 주요하게 구성하는 정체성이 따로 있을 때는 카페 일을 '엄마를 도와드린다'는 마음으로 했다면, 지금은 다르다.
요즈음의 카페 일은 진짜 '내 일'인 느낌이다. 이제는 내 생활비를 충당하는 주 수입원이 되기도 했고, 나도 회사에 쓰이는 에너지가 없어지면서 가게 일에 많이 신경쓰고 몰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소하게 신메뉴 포스터를 어느 쪽에 두면 고객들에게 더 잘 보일까, 우리 손님들은 어떤 식으로 응대를 하는 게 더 잘 먹힐까, 뒤쪽 창고 배치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없을까 - 하는 이전에는 하지 못한(하지 않은) 생각과 실천들을 하면서, 결국 이 또한 PM으로서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유무형의 서비스를 쓰는 사람의 니즈를 파악하고 만족감을 주어 가치와 수익을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신기하게도 PM으로서와 카페 알바로서의 능력이 통하는 것이 많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순간들도 느꼈다.
사실 나는 카페에서 일하는 것이 꽤 즐겁다. 커피나 디저트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일과 육체노동이 주는 활력이 즐겁다. 3년 반, 취준 기간까지 합치면 그보다 더 긴 기간동안 나는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무형의 제품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 공부하고 일했다. 물론 그래서 더 더 큰 임팩트를 가진다는 것이 일하는 동력이었고 즐거움이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분에 피로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즉각적인 가치를 준다는 것,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과 연결된 일을 한다는 것, 생각이 동굴 속으로 들어갈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 카페가 마감하고 나면 일이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종류의 노동이 주는 활력이 분명히 있다. 늘 바빴던 회사생활을 다니면서도 꿀같은 휴일마다 카페 일을 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 더, 엄마를 직업인으로서 존경하게 됐다.
퇴사한 다음날부터 3주 정도 엄마를 휴가를 보내드리고 풀타임으로 카페를 봤다. 노동 강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매장이 아닌데도,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출퇴근 시간을 합하면 열두시간이 넘는 이 일을, 엄마는 카페 오픈 이후 일년 남짓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창창한 이십대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환갑을 앞두고도 '내 일이니까, 내가 사장이니까'하며 당연하게 일해온 엄마가 대단하다고 느꼈고, 회사를 다니며 카페에 출근할 때 종종 피곤한 티를 내며 짜증냈던 게 정말 미안했다.
또 노동강도와는 별개로, 엄마와 함께 일하면서 자영업자로서의 엄마의 면면이 노하우로 가득차 있다고 느껴 멋졌다. 엄마는 이십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7번의 자기 매장을 열었다. 책방, 옷가게, 학원, 식당, 어묵가게, 편의점, 카페 까지. 회사로 따지자면 엄청 다양한 도메인의 지식을 가진 시니어 아닌가...!
커피에 대한 제일 가는 전문가는 아닐지언정, 사람을 대하는 자영업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느꼈다. 이런 컴플레인은 이렇게 대처하는 게 깔끔하고 뒤가 안 힘들다, 요런 고객님은 커피를 내어줄 때 요렇게 해주면 좋아하신다, 앞뒷 매장의 매니저분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 게 좋다, 디저트 샘플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두는 게 고객들이 더 많이 보고 쉽게 읽을 거다.. 이렇게 툭툭 던지는 당연한 말들이, 나도 직업인으로서의 시간을 거치고 나니 모두 소위 '짬바'라는 것을 진하게 느꼈고, 사회생활 선배로서 엄마를 존경하게 되었다.
#6 이모저모의 사건들
시기적으로는 퇴사할 때즈음부터 연말까지, 나와 나를 둘러싼 주변, 그리고 세상에 참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내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세상을 긍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들로 삶의 활력을 찾기도 했다.
참기 힘든 분노와 괴로움을 느끼면서, 내가 수년의 사회생활동안 잊고 살았던 내 중심축을 구성하던 가치들을 다시 바로 보게 되었다.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가치에 무뎌졌다는 것, 언젠가는 갚을 일이 있겠지 하면서 다른 이들의 실천에 빚진 것, 사실은 그 시간동안 나는 그저 무뎠던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을 내 속안에 축적해왔다는 것, 다시 알을 깨고 나오니 역시 내 삶의 가치는 여전하고, 빚진 시간을 이제는 실천으로서 갚을 때가 되었다는 것.
야속하게도—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중심축은 늘 심연의 괴로움과 함께 바로 세워지고, 건강한 괴로움을 먹는 시간은 늘 나를 인간으로서 성장시킨다. 차마 블로그에는 남기기 힘든, 그리고 몇 문단의 글로 남길 수 없는 이 사건을 견뎌낸 시간들이, 사실은 내가 2024를 내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로 느끼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선택한 다음 스텝을 더욱 긍정하게도 되었다. 5년 전 유럽에서의 내가 왜 그토록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는지, 한국에서의 나는 무엇이 고팠고 그곳에서의 나는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왜 내가 당장의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를 대지 못하면서도 이 선택에 끌렸는지를 명확히 할 수 있게 되었다.
#7 게으르지만 조금씩 유학 준비
퇴사후 조금씩 계속 석사 유학을 위한 준비를 했다. 나라는 영국, 전공은 서비스디자인을 목표로 했는데, 나는 디자인 베이스의 경험과 경력이 없다시피 해서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물론 해외에서 디자인의 개념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것보다 훨씬 광의로 쓰여서 기획/설계 등의 개념을 포함하고, 서비스 디자인은 더욱 그 맥락을 지니기 때문에 내가 목표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익숙한 방식인 자소서나 다른 정량적인 요소들보다 시각적 표현으로서의 포트폴리오가 훨씬 중요한 전공이기에, 포트폴리오라는 것을 만들어보지 않은 나에게는 그 자체가 챌린지였다.
여름에 퇴사를 하고 12월-1월이 지원기간이었으니 절대적인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지만(게으름 이슈로 사실 시간도 부족했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준비해야 할 내용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그에 맞춰 지난 내 경험을 정리하고 정의하는 것이 많이 어려웠다.
하지만 어쨌든 어찌저찌 1월 초중순 즈음에는 지원을 마무리했고, 이 자세한 과정도 이후에 석사 준비 과정에 대해 쓸 글에 담으려 한다.
느린 행정처리로 악명높은 영국 학교들이었는데,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히 회고를 쓰는 지금은 어떤 학교에 가게 될지 확정되었다! 유학을 마음 먹었을 당시 가장 가고 싶었던, 어쩌면 내 다음 스텝의 방식을 유학으로 결정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학교였어서 오퍼를 받고 정말 기뻤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기쁨과 설렘은 잠시 뿐, 이제는 진짜가 된 여정을 준비하려니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어찌저찌 하다보니 되었으니.. 앞으로도 어찌저찌 하다보면 될 것이라고 막연히 긍정하는 중이다 하핫..
2025년에는 무엇보다 - 지금의 반짝임을 현상유지하기
2024년은, 수년간의 사회생활에서 내가 의식/무의식적으로 잃어갔던 반짝임을 되찾는 시간이었고. 그 덕에 현재를 자신 있게 행복하다고 말하고, 힘듦을 떠올리려면 생각을 오래 해야 하는 상태로 한 해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2025년에는, 어렵게 되찾은 내 반짝임을 계속 붙들고만 있는다면 구체적인 삶의 컨텐츠는 어떨지라도 분에 넘치게 감사하겠다.
아래는 2025년이 오기 직전 올린 인스타 피드 글이다. 지난 해의 내게 강력히 남은 기억과 후년에 대한 기대를 잘 집약했다고 느껴 가져왔다.
2025년에는
지금 정도의 반짝임을 최대한 현상유지할 수 있기를
성공에 대한 것이라면, 큼직큼직한 선택들 정도이기를
강박이 되돌아오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를
괴로움이 있다면, 그간 빚진 가치에 대한 실천에 따른 것이기를
내년에는 너무 빚지지 않기를!
작년의 나 정말이지... 한 해 너무 고생했고 행복했고 괴로웠고 충만했다!
내년의 지금에도, 늦음을 변명하면서, 무엇보다 그대로인 반짝임으로 웃으며 한 해를 회고하고 있길 - 움채채 💥한 해 고생 많았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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